지역 상권의 새로운 변화

동네의 골목길과 특정 장소에는 사람들의 기억과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기억과 흔적은 동네 사람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골목길과 오래된 공간들이 사라지면 공동체의 정체성도 같이 흔들리게 된다. 오래된 가게들이 우리 삶의 일부이며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골목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오래된 가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저 낡은 것으로 치부되며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트렌디하고 유명한 지역을 그대로 좇아 서둘러 변신시켜 모든 지역을 획일화하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진 세대들은 자기 자신을 잃은 것처럼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지 않는 장소는 없다. 오래된 가게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명력이 긴 가게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되, 과거와 미래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며 살아남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흔적을 유지한 채 과거와 미래의 기억을 연결하는 '새로운 가게' 역시 또 다른 형식의 '오래된 가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 여기 원래 금고 있던 곳 아니었나?” 한 소년이 뛰어들어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1층과 2층 이곳저곳을 기웃대더니 매니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안녕히 계세요!”라고 경쾌하게 말하며 뛰어나갔다. 이 아이는 분명 이곳에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으며 자라날 것이다. 

잠시 후엔 얼굴이 검게 그을린 부부가 아기를 안고 들어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 이주민, 여행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사계생활'이다. 

사계생활이 위치한 서귀포 사계리는 산방산과 단산, 그리고 바다로 둘러싸인 한적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소유의 건물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농협이 지점을 폐쇄하면서 이곳은 빈 건물이 되었다.

2013년부터 제주의 컨텐츠를 발굴하며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제주iiin>을 만들어온 ‘재주상회(고선영 대표)'는 서울 연희동에 거점을 둔 도시문화 컨텐츠 기업 ‘어반플레이(홍주석 대표)'와 합작 법인으로 2018년 말 ‘로컬리지’를 설립하고 이곳에 사계생활을 오픈했다. 

1층은 카페이자 편집숍으로, 2층은 재주상회의 사무실과 코워킹 스페이스로 활용하고 있다. 농협의 흔적인 은행 금고도 그대로 있고, 지점장실, 대기표 등 과거의 메타포들을 공간 안에 그대로 두었다.

사계생활은 마을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이자 제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컨텐츠들이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서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존중 받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을 청년들은 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미래를 창의적으로 꾸려갈 자극과 연결을 얻고 있다. 사계생활을 통해 사계리는 마을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미래 가치를 만들어갈 든든한 공동체의 장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차로 10분,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제주시 원도심 용담2동에는 돌담집의 흔적을 간직한 세련된 카페 다랑쉬가 있다. 이 돌담집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3대가 함께 살았던 기억을 간직한 현승훈 대표는 고향으로 리턴하여 다랑쉬 건축사무소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하지만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일만 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살았던 제주시 원도심 골목은 쇠퇴해가는 곳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3대를 연결하는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낡은 돌담집을 언제 허무나 하면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현 대표가 돌아오자 이제 이 돌담집을 허물고 번듯한 새 건물을 짓겠지 하며 기대했다. 그런데 그가 옛집을 허무는 대신 오래된 나무 기둥과 지붕을 살리고, 문짝을 테이블로 재사용하려 하자 마을분들 대부분이 만류했다고 한다. 서울로 가서 성공한 이가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옛집을 허물지 않고 되살린다니!

하지만 건물이 완성되자 반응은 달라졌다. 카페 다랑쉬는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치를 연결하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동시에 여행객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각자의 관점이 확장되고 새로운 기억을 함께 쌓아감으로써,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고 지역이 변화해 가는 매개체로 재탄생한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세르토는 <일상생활의 실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억은 우리를 그 장소에 얽어맨다. 그것은 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구역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 기억이다.” 어떤 사람의 기억이 흔적과 이야기로 남고, 그것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전승되며 새롭게 이어지면 그곳은 더욱 살 만한 곳이 된다. 

오래된 골목길과 장소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고, 지역민과 이주민, 여행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곳이 된다면, 개개인의 기억은 확장되고 공동체는 자존감을 바탕으로 연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연결 속에서 고유의 것이 다양성과 융합되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샘솟게 될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새로운 가게는 그렇게 또 다른 오래된 가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