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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 대한 애정을 담은 작은 프랑스 빵집 '디어필립'
가게지기 1기
22.10.04
수지구청역 주변은 학원과 프랜차이즈로 가득해 지루한 곳이다. 이 거리에, 있는 듯 없는 듯 2011년부터 자리를 지키는 작은 프랑스 빵집이 있다. 낡은 간판에 협소한 매장, 심지어 그 흔한 SNS 계정 하나 없지만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디어필립’이다.
필자는 12살 때 이곳에서 시식으로 준 깜빠뉴를 먹고 빵이 이렇게나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디어필립 신준섭 대표는 바게트처럼 ‘겉바속촉’한 사람이다. 겉모습은 약간 무심한 듯 보이지만 가게에 방문하는 사람을 항상 반갑게 맞아주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작은 프랑스 빵집 디어필립 신 대표와 대화를 나눠봤다.
20년 넘게 회사생활을 했던 신준섭 대표는 야근과 휴식이 없는 삶에 지쳐있었고 변화가 필요했다. 오래전부터 자영업을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길 같았다. 자영업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 배합표를 정리하다 떨어진 엽서 한 장에 눈길이 갔다. ‘From. 필립 토마’ 빵을 배웠던 스승님이 보냈던 엽서였다. 그는 애정과 고마움을 담아 빵집을 열고 간판에 ‘필립’을 새겨 넣었다.
스승의 이름을 넣은 디어필립 간판
신준섭 대표는 SPC와 한스 등 제빵제과계열의 식품회사를 다니면서 회사와 자영업 사이에서 5, 6년 정도를 고민했다. 오랜 기간 관련 업계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실 빵이 정말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 만큼 신 대표는 빵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고 나만의 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결국, 다시 빵으로 디어필립의 문을 열었다. 그는 유행이나 트렌드를 좇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었고 ‘본연에 충실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나만의 색을 넣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디어필립의 빵이다.
디어필립 내부, 2층은 매장 취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대화에서 신준섭 대표는 안정적인 것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뚜렷하고 기본적인 것, 질리지 않고 오래갈 수 있는 것들을 선호하였다. 이 생각들이 모여 ‘디어필립’의 빵이 되었다. 디어필립의 모든 빵에는 중종법이 사용된다. 중종(sponge)은 발효종의 일종으로, 전체 사용량의 30~100%에 해당하는 밀가루와 물, 이스트로 만들어지는데, 이 중종을 1~72시간 정도 발효시킨 후 나머지 재료를 넣고 빵을 만드는 방식이 바로 중종법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워도우나 천연발효종과 비교한다면 중종법은 가벼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워도우와 천연발효종 특유의 산미는 빵을 쉽게 질리게 하는 반면, 가볍지만 기본에 충실한 중종법으로 만든 빵은 질리지 않고 꾸준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중종법으로 만들어진 메뉴들 역시 안정적이다. 바게트, 깜빠뉴, 크로와상, 뺑오쇼콜라, 후스틱, 5가지 메뉴는 품절되지만 않는다면 디어필립을 찾은 손님이 항상 구매할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한 것들’이다. 요즘 베이커리나 디저트 카페의 메뉴 라인업은 항시 다른 경우가 많다. 내가 원하는 메뉴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선 가게의 공지를 확인해야 하고, 원하는 메뉴가 없으면 원하는 메뉴가 라인업에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론 다양한 메뉴를 손님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게의 전략이겠지만 먹고 싶은 것이 없을 때 느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부분에서 메뉴가 안정적인 디어필립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곳이었고 ‘여기 가면 이건 있어’라는 손님들의 생각이 디어필립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10년 넘게 빵을 만들어 온 신준섭 대표의 손(좌) 주문이 들어오면 식혀놨던 빵을 꺼내 포장해주신다.(우)
더불어 이 ‘안정성’은 신준섭 대표가 가진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디어필립은 오전 11시 30분에 문을 열고 오후 6시 30분에 문을 닫는다. 다른 빵집들과 비교한다면 디어필립은 늦게 열고 일찍 닫는 빵집이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은 디어필립의 정기 휴무일이다. 다른 빵집들과 다른 영업방식에 대한 신준섭 대표의 답변은 ‘오래가기 위함’이다. 휴식이 있어야 오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가게를 오래 유지하려면 ‘나의 생활’과 본업이 나눠져, 지켜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 신준섭 대표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11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다 보면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디어필립을 둘러싸고 있던 영어유치원들은 보습학원들로 바뀌었고 엄마 손을 잡고 빵을 사러 오던 꼬마들은 학생이 되어 학원가기 전에 먹을 빵을 사기 위해 디어필립을 찾아온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너무 먹고 싶었다며 빵을 잔뜩 사가던 손님이 있는가 하면 얼마 전엔 일본에서 돌아와 오랜만이라며 수다를 떨다간 가족 손님도 있다.
반가운 소식도 있지만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온다. 단골이었던 손님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때 다른 손님이 와서 암 투명 끝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 ‘그 사람 이 빵 참 좋아했는데’ 하며 남자 손님의 부고를 전해주던 다른 손님의 말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2층에서 찍은 ‘디어필립’의 내부다. 매장이 협소하지만 벽면의 거대한 거울 덕분에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가게가 투박하다고 제품이 투박해 보여서는 안 된다.’ 빵에 대한 철학을 물어봤을 때 신준섭 대표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있을 당시 유명한 셰프가 운영하는 디저트 가게를 갔다. 마카롱 2개를 구매했을 뿐인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해준 것이 너무 감동이었다. 그 영감을 받아 디어필립에선 빵을 썰고 포장할 땐 항상 흰색 장갑을 낀다. 유리그릇을 활용하여 빵을 먹음직스럽게 진열하는 방식과 낮은 모자에 짧은 흰색 앞치마 역시 빵을 대하는 디어필립만의 진정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좋은 추억이 되고 대접받을 수 있는 곳’ 이것이 손님에 대한 디어필립의 철학이다.
그릇에 이쁘게 놓여있는 빵들, 이미 팔린 빵들이 많았다.
더불어 신준섭 대표는 프랑스 빵에 대한 관념 변화를 강조했다. 이는 시식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 코로나 전 손님들이 들어오면 신준섭 대표는 빵부터 건냈다. 빵을 사지 않아도 ‘이게 뭔가요?’하면 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빵을 시식할 수 있게 해줬다. 그 덕분에 동네에 ‘취미로 장사하는 빵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준섭 대표는 시식을 통해 바게트나 프랑스 빵은 딱딱하고 맛이 덜하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념을 깨고 싶었고 그 일환으로 모든 손님에게 시식을 권하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신준섭 대표는 디어필립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것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게 인테리어와 노후된 곳을 손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신준섭 대표는 메뉴를 변경을 통해 가게의 색 자체를 바꿔볼 의향도 있다고 답했지만 이 모든 것이 기본을 지키는 한에서 파생된 다른 것들에 변화를 줄 예정임으로 디어필립만의 ‘안정성’은 유지될 것이다.
명함의 앞장(좌) 명함 뒷장에는 먹고 남은 빵을 보관하는 방법과 맛있게 먹는 법이 적혀있다.(우)
디어필립의 신준섭 대표는 빵에 대한 애정이 깊지만 단호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내내 빵과 가게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지만 개인 생활과 본업을 분리하며 적절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준섭 대표는 목표를 위해선 한 곳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한 가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 주변의 것들을 돌보고 균형을 맞춰 가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수지구청역을 오게 된다면 ‘깐깐하지만 빵은 잘하는’ 디어필립에 들려 크로와상을 하나 사 먹어 보길 추천한다.
글 | '작은가게 오래가게' 대학생 서포터즈 이정우
본 포스팅은 작은가게 오래가게 대학생 서포터즈 '가게지기' 활동의 일환으로 활동비를 제공 받아 작성된 홍보 콘텐츠이며, 광고나 협찬 없이 소상공인을 직접 발굴하여 인터뷰를 진행해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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